반대性 연구해 유행 이끄는 ‘콘트라 리더’의 세계
“이런 젠장, 여자들은 미쳤어!”
코에 ‘팩’을 하고 나타난 이 남자에게 살기가 느껴진다. 여성의 속마음을 알기 위해 그가 도전한 과제는 바로 ‘털 없애기’. 매니큐어, 마스카라, 브래지어 사용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세면대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놓은 그는 쑥스러운 듯 제모 크림을 바르며 쉴 새 없이 혼잣말을 늘어놓는다. “오, 나 진짜 털 밀고 있지.”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이내 “이해할 수 없다”며 씩씩거리는 이 남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욕실 바닥에 미끄러졌고 욕조에 빠진 드라이 때문에 감전되고 만다.
2000년 개봉한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영화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는 마초(macho·남자다움을 과시함)적인 광고 기획자 닉 마셜(멜 깁슨)이 여성을 타깃으로 한 광고를 만들기 위해 ‘여성 체험’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감전을 당한 후 그는 여성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을 갖게 되고 여자 상사 다시 맥과이어(헬렌 헌트)의 자리까지 넘볼 정도로 승승장구한다. 그가 ‘여성 트렌드 리더’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심리 치료사. 그녀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프로이트는 죽는 순간까지도 이걸 생각했죠. ‘여자가 원하는 것’, 만약 이걸 안다면 당신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어요….”
8년 후. 그의 대사는 날개를 달았다. 생리대를 차고 다니는 남성 생리대 연구원부터 발기부전 치료제를 직접 먹는다는 여성 PM(프로덕트 매니저)까지…. 자신과 반대의 성(性)을 연구하며 유행을 만들어 가는 이른바 ‘콘트라 리더(Contra-Leader)’들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이는 남자 간호사, 여군 등 단순히 직업의 ‘성벽’이 무너진 것에서 더 나아가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연구 주체가 서로 뒤바뀐 상황을 뜻한다.
남성을 먹여 살린다는 여자 셋, 여성보다 여성을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남자 셋이 모였다.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에서는 더 이상 “이런 젠장” 같은 푸념은 들리지 않았다. 저마다 “내가 세상을 지배한다”며 ‘왓 위민 원트’의 ‘2008년 버전’ 주인공을 자처할 뿐….
라운드#1 여자를 연구하는 남자들 입장!
여성을 연구하는 남자 셋. 남성을 연구하는 여자 셋. 자리는 금세 3 대 3 대결구도에 휩싸였다. 마치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는 듯 팽팽한 눈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이윽고 맏형인 생리대 전문가부터 입을 열었다.
▽한기영(38·대한펄프 생활용품사업본부 제품개발팀에서 13년째 생리대 ‘매직스’를 연구하는 유일한 남성 연구원)=“여성용품을 비롯한 여성 트렌드를 이끌어 가는 주역은 남자더군요. 여성들은 매일 사용하면서 타성에 젖어 느끼지 못한 것을 남성들은 ‘기발하다’며 발견하기 때문이죠. 전 ‘울트라 슬림’부터 최근 ‘한비’(한방 생리대) 시리즈까지 13년간 생리대만 연구했는데 신제품 아이디어는 늘 제가 맡았어요.”
▽박현중(30·웅진 쿠첸 생활기술연구소 전자밥솥 연구원. 밥맛 연구만 4년째)=“전 전기밥솥 업계를 통틀어 유일한 남자 연구원입니다. 과거엔 밥맛 연구는 살림하는 주부들을 따라갈 수 없다 했는데 이젠 아닙니다.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체력이거든요. 하루 평균 쌀 80kg(500인분 이상)의 밥을 짓고 20공기 이상의 밥을 먹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전 ‘밥맛’에 있어선 아줌마들을 이끌고 있는 트렌드 리더입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콘트라 리더란:
‘반대’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 ‘콘트라(Contra)’에다 ‘리더’를 합친 파생어. 남성성을 연구하고 남성의 유행을 만드는 여성, 반대로 여성성을 연구하고 여성의 분야를 이끌어가는 남성을 뜻한다. 서로 반대의 성 영역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일’보다 ‘연구’에 초점을 맞춰 성역(性役) 없이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최용호(34·프랑스 여성 헤어용품 전문회사 ‘바비리스’의 ‘밸리스 볼륨매직’ 마케팅팀에서 10년째 여성 헤어만 연구)=“저희 부서에는 팀원이 총 5명인데 모두 남자죠. 여자 연구원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연구를 한다면 저를 비롯한 남자 연구원은 ‘내 여자가 이런 헤어스타일이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연구를 합니다. 온도 조절 기능이나 손잡이 느낌을 마치 내 여자를 다루듯 연구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더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라운드#2 남자를 연구하는 여자들 납시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과감히 ‘자원’했다는 것이다. 이에 팔짱 낀 여성들,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우리도 자원했다”라며 소프라노 목소리로 뽐내기 시작했다.
▽김래진(27·제약회사 바이엘코리아의 남성 발기부전 치료제 ‘레비트라’ 담당 PM)=“전 기혼인데 남성, 그것도 발기부전 연구에 저 같은 기혼여성이 갖는 장점이 있어요. 상담을 해보면 가끔 ‘너 해봤어?’라고 무시하듯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때 저는 ‘네, 먹어보기도 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해요. 여자가 그런 말을 하니 오히려 남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신기하게도 발기부전 치료제를 만드는 제약회사 3사 담당자가 다 여성이에요. 아마 남자들보다 ‘샘플’을 덜 써서 그렇지 않을까요?”
▽조희경(27·OB맥주 이천공장 품질관리팀 맥주 맛 관능검사 전문가)=“맥주 맛을 연구하는 데는 남자보다 여자가 유리해요. 담배도 안 피우고… 감각, 특히 미각이 발달해서 그렇죠. 회사에서 특별관리까지 받고 있답니다. 화장품, 향수는 물론이고 섬유유연제도 사용하지 못 하게 하고 음식도 짜고 맵게 먹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남자의 맛을 여자인 내가 정한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죠.”
▽정수연(25·볼보 건설기계코리아 유압팀 연구원)=“전 저희 회사에 두 번째로 입사한 여성 연구원입니다. 도면 하나를 그리더라도 남자보다 더 섬세하고 꼼꼼해서 우악스러운 건설기계 연구에는 여성이 더 낫죠. 내년에 새로 발매될 기계의 설계도 제가 맡았답니다.”
라운드#3 ‘콘트라 리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순히 호기심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최고가 되려면 그 대가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특히 이들 중 4명은 현재 연구 분야와 관계없는 전공 출신자였다. 반대 성을 연구하는 이들의 노력은 운명이요, 마치 우아한 백조의 ‘물갈퀴’ 같았다.
▽한=“앉아서 연구만 하면 답이 나오나요. 그래서 회식 자리 가서 슬며시 빠져나와 식당 주방 아줌마들에게 넌지시 말을 걸죠. ‘그거 뭐 쓰세요?’라고요. 처음엔 절 ‘변태’ 취급 하지만 샘플을 나눠주면 일단 받더라고요. 하지만 그것도 잘 안 될 때는 제가 직접 차보기도 하죠. 느낌이나 감촉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 물론 주변 사람들 모르게요.”
▽최=“전 여성 헤어스타일 연구 때문에 버스나 지하철 등 공공장소에서 여성들의 머리만 보다 오해를 산 적이 많아요. 특히 소개팅 자리에서 머릿결이 좀 나쁜 상대 여성에게 직언을 했다가 바람맞은 적도 있어요. 지금 제 최고의 연구 상대는 아내랍니다. 신제품 테스트를 아내에게 하기 때문에 머리를 계속 기르라고 압박하고 있죠.”
▽박=“밥맛 연구를 위해 10년 넘게 피웠던 담배를 끊었어요. 음식과 친해지기 위해 한국식품연구원에 가서 음식 강좌도 듣고 한식 자격증도 땄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실전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밥맛이 별로라며 항의하는 아줌마 고객 집으로 직접 찾아가 ‘밥 전쟁’을 벌이기도 한답니다. 처음엔 다들 ‘밥은 지어 봤냐’라며 총각인 절 무시하지만 현장에서 직접 밥을 짓고 함께 먹으면 그때부터 절 보는 눈이 달라지더라고요.”
라운드#4 나를 변화시킨 건 8할이 연구
하루 80kg의 밥을 짓는 박 연구원에게 주부 습진은 기본이다. 밥을 시도 때도 없이 먹는 바람에 속 쓰림은 물론 신물이 넘어오는 것도 다반사다. 대립 각을 세우며 대화를 나누던 6명의 연구원 사이로 여기저기서 “맞아, 맞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대의 성을 사는 이들, 어느덧 익숙해진 그 삶에 대한 신세 한탄이 이어졌다.
▽조=“몇 년째 맥주 맛만 연구하다 보니 집에 있는 화장품, 향수 용기에 곰팡이가 생기더라고요. 시끄러운 공장에서 계속 소리 지르며 살다 보니 목소리도 걸걸해지고…여성성을 잃은 것 같아요.”
▽김=“처음엔 택시 안에서 회사 전화를 받기가 민망했어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택시 운전사 아저씨들이 발기부전 치료제의 주 고객층인 40, 50대에 몰려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대놓고 ‘오르가슴’, ‘삽입’ 같은 얘기를 하기 시작했더니 대부분의 아저씨들이 ‘내 친구 얘긴데…’라며 상담을 받으려 하시더라고요. 심지어 ‘해병대’나 ‘조기축구회’ 같은 데 가보라며 등 떠미는 아저씨도 있죠. 이젠 아예 아버지께도 ‘요새 잘되세요?’라고 직접적으로 묻게 되더라고요. 처음엔 충격을 받던 아버지도 이젠 적나라하게 대답을 해주세요.”
▽정=“새로운 중장비 기계를 만들기 위해 부품을 조립하고 기름을 넣다 보니 이젠 미끌미끌한 기름만 봐도 정말 좋아요. 그 향긋한 기름 냄새란….”
라운드#5 다시 태어나도 콘트라 리더
아무리 ‘프런티어’라 외쳐도 이들에게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직접 경험’의 부재다. 김 연구원은 “반대의 성을 연구하며 선입견을 깨려 해도 발기부전에 대한 고통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위선처럼 보일까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콘트라 리더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이젠 극단적인 남성성, 여성성은 사라지고 남성의 이성과 추진력, 여성의 감성과 섬세함이 어느 분야든 공통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회사 역시 이런 시너지 효과를 위해 이들을 전략적으로 발탁했고 각 분야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인터뷰 말미, 이들에게 기습 질문을 던졌다. “다시 태어난다면 뭘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끝마치기도 전에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지금처럼 콘트라 리더가 돼 있을 것”이라고. 만약 반대의 성으로 태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자 ‘발기 부전제’ 박사 김 PM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지금과 반대로 새로운 여성 불임 치료제를 만드는 연구원이 돼 있을 거예요. 그때도 콘트라 리더가 되고 싶어요. ‘왓 위민 원트’의 닉처럼 여성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Review & Gadget > Web Servie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케이스위스] '다워지기 마케팅' (2) | 2008.03.11 |
---|---|
'情' 하면 떠오르는 초코파이 (0) | 2008.03.11 |
'PD수첩' 용인대 신입생의 죽음, 사고 혹은 살인? '분노의 파장' (0) | 2008.03.06 |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국민견' 상근이> (0) | 2008.03.06 |
[공모전] EYE2O ‘눈물이야기’ 소재공모 (0) | 2008.03.04 |
댓글